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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슬픔과 함께 고향의 추억 속으로

어릴 적 친정아버지가 꾸민 서재에는 보물단지 책상 하나가 있었다. 큰오빠가 이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 연유로 고등학생이던 나의 두 사촌 오빠가 교대로 우리 집의 그 책상에서 공부하다 가는 날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 오빠의 아들들이었다. 그런데 큰집의 막내아들인 오빠는 서울대에 들어갔고 작은집의 오빠는 후기 대학에 합격했다. 최근 큰집 오빠의 부음을 작은집 올케로부터 들으며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올케는 남편이 장례식에서 서럽게 울더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고인이 된 오빠는 자기 형처럼 유명한 농대를 졸업했지만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잘 난체도 열등의식 같은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다.     큰 외갓집은 어머니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양자로 들어오신 삼촌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1928년은 딸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어머니는 그 삼촌과 공동명의로 논밭 조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있었지만 나는 큰 외사촌 언니와 오빠를 좋아했다. 시청 근처인 광산동에서 외삼촌은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오래 운영했다. 그리고 외삼촌 댁 이층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면 초중고생 사촌들이 모였다. 차례로 교자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오빠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유명회사에 지원했지만 잘 안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빠는 결국 외삼촌처럼 자전거 대리점을 양동 상가에 차렸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결혼했다. 올케는 우리 동네 이웃의 착한 딸이라며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당시 올케도 나처럼 교사여서  퇴근길에 오빠네 가게에 들러 올케랑 이야기도 종종 나누며 정도 들었다. “아가씨, 오셨수?”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고향에 가면 꼭 하루 자고 싶은 그 다정한 오빠와 올케네 집.     얼마 전 한국의 한 지인이 나에게 공진단을 보내준다기에 대신 그 오빠에게 선물해 달라고 했다. 오빠는 그때 간암 투병 중이어서 본인이 먹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공진단을 보내준 지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갔었다고 한다.     오빠의 병환 중에 가끔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최근 내가 병원에 다니느라 잠시 소홀했더니 그사이에 별세한 것이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잘 있냐, 애 아빠 잘 계시냐”고 말했던 오빠였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예쁜 동생아, 좋은 글 많이 써라”였다.  보고 싶은 오빠, 우리가 모르는 고민 다 떨구시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구려. 최미자 / 수필가문예 마당 고향 추억 어머니 오빠 막내아들인 오빠 오빠네 가게

2024-08-29

[문예 마당] 사막에 내린 비

뜨거웠다. 문학을 사랑하는 열정은 날씨 못지않게 더웠다. 일 년 만에 개최하는 미 전 지역 문인들 모임이랄까? 미주 문인협회 주최로 여름 문학 캠프가 팜 스프링스에서 열렸다. 수개월 전부터 임원진은 강사와 장소 선정, 프로그램 구상, 진행 계획을 세웠다. 앞에서 추진하는 회장단과 뒤에서 조용히 협력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회장단은 자기 일을 뒤로 제쳐놓은 채 협회 일을 우선으로 솔선수범했다. 또한 스스로 뒷전에서 앞장서는 회장을 도우며 행사를 위해 못자리를 마련하는 임원도 있었다.     수레는 앞뒤 균형 잡힌 바퀴에 의해 움직이지 않던가. 행사 며칠 전부터 한국 강사진과 텍사스, 시카고, 알래스카, 캐나다와 멕시코에서 참여하는 회원들을 맞이하기 위한 발걸음은 바빴다. 이렇게 넓은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문학 한마당이 펼쳐지다니 놀라웠다. 시, 수필, 소설, 아동 문학 장르라는 합집합 속에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집합이 꽃을 피워 낸 게다. 신인상 수여를 통해 참신한 인재를 발굴하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이어 미주 문학상 수여가 있었다. 특별히 “30회가 되도록 수필가가 선정된 것이 처음이라니, 참으로 미주 문학사에 뜻깊고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얌전하고 순진한 글이지만, 그 속에 정서적 깊이가 깃든 독특한 미학을 가지고 있어 그 작가마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손홍규 소설가는 심사평을 했다.     수필은 수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일상의 정겨운 이야기를 품은 글이다.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아름답게 재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슬기로 이끌어 친밀감을 빚어낼 수 있는 문학이 아니던가.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기는 시점을 찾아서’, 손홍규 소설가의 ‘사연과 진심을 담아 소설 쓰기’라는 주제로 강의가 있었다.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 연세에도 돋보기 너머의 글을 읽으며 열공하는 모습은 진지했다. 회원 모두 표정이 밝았다. 명절을 기다렸다는 듯 곱게 차려입으신 선배들의 모습에 덩달아 내 마음도 화사해졌다. 그동안 안부를 묻고 안녕을 확인하며 서로에게 위로를 건넸다. 이어지는 교제의 시간은 흥겨웠다. 뜨거운 불 곁을 마다치 않고 갈비를 굽는 임원의 수고 덕분에 모임은 한결 맛깔스러워졌다. 게다가 그 뜨거운 자리를 교대하며 배려하는 회원도 있었다. 뒷정리까지 옷소매를 걷고 도왔다. 남은 갈비를 지혜롭게 처리해 준 옛 임원 덕분에 귀갓길 버스에서 배고플 회원들에게 전달되어 따뜻한 마무리가 되었다. 진행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사소한 문제가 생겼지만, 물이 빈자리를 메꾸듯 서로 자연스레 협력하여 흘러갔다. 폭염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요즘, 한줄기 소나기를 맞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희숙 / 수필가문예 마당 사막 수필 미주 문학상 미주 문학사 손홍규 소설가

2024-08-29

[문예 마당]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노

  올여름, 연일 기록적인 폭염이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삐뚤어진다’는 속담이 있건만 9월을 코앞에 둔 지금도 한국은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다.     최악의 더위였지만 그래도 한줄기 기쁨은 ‘2024 파리 올림픽’ 현장에서 들려오는 우리 선수들의 메달 소식이었다. 선수들의 활약 덕분에 올림픽 기간인 2주간 온 국민이 행복했다. 선수들의 땀과 투혼은 국민의 가슴 속에 큰 감동과 시원함을 안겨줬다. 특히 한국 탁구의 12년 묵은 체증을 풀어준 ‘삐약이’ 신유빈 선수는 올림픽 기간 내내 국민에게 많은 기쁨을 선사해 줬고,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반면, 28년 만에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는 다른 이유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시상식이 끝난 직후 돌연 배드민턴협회를 향해 작심 비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상과 관련된 협회의 대응 등 그동안 묵혀뒀던 문제점들을 세상에 드러내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안 선수는 인터뷰에서 “꿈을 이루기까지 나의 원동력은 분노였다”며 협회의 부조리를 거침없이 토해냈다. 반응은 다양했다. 안 선수의 용기 있는 발언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성급한 인터뷰로 인해 올림픽에 출전했던 다른 선수들의 선전이 묻혔다고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안 선수는 한국에 돌아와 2차 폭로를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대표팀에 발탁된 뒤 7년 내내 막내라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선배들의 끊어진 라켓 줄을 갈고, 선배 방의 청소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빨래까지 도맡아야 했다고 주장했다. 안 선수가 시대착오적 악습에 시달려 왔다는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협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는 커졌다.     안 선수가 대표팀 내 위계질서에 시달린 사실이 알려지면서 얼마 전 은퇴를 한 ‘배구 여제’  김연경의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김연경은 지난해 5월 방송된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프로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막내 생활이 쉽지 않았다. 선배님도 많고, 규율도 심해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김연경은 그때는 빨래를 모아서 후배들이 하는 시스템이었다. 빨래도 산더미처럼 많았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아침 식사 전에 청소해야 했다.  늦잠 자면 혼나기도 했다.  1~2년 그렇게 하다가 ‘여기 내가 빨래하러 온 건지 운동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고 따졌다고 한다. 배구하러 왔는데 배구보다 빨래하고 청소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김연경의 발언으로 지금은 배구협회가 많이 개선되어 선수들이 좀 더 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악습을 관습이라며 무조건 참는 게 능사가 아니다. 사회적 분노가 정의와 결합하면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민권 운동은 공정한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이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를 평화적인 시위와 연설로 표현하며, 결국 법적 변화와 사회적 인식을 끌어냈다.     로사 팍스라는 흑인 여성은 추운 겨울 재봉사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버스에 올라 버스 중간석에 앉았다. 잠시 후 백인 승객이 버스에 타자 운전사는  피곤함에 지쳐 졸고 있는 팍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가라며 호통을 쳤다. 그때 피곤함에 지쳐 있던 팍스는 “노(no)”라고 반발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일로 팍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포까지 됐다.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평소 흑인 차별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킹 목사는 지역 흑인 지도자를 규합하여 사건이 발생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시내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에 많은 사람이 동참하며  버스 대신 걸어서 출근하는 흑인 물결이 거리를 메웠다.     당시 정부는 주동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회유, 협박도 모자라 투옥까지 했지만 버스 승차거부 운동은 오히려 확대됐다. 여기에 뜻 있는 백인들까지 동참하자 연방대법원은 1956년 11월 몽고메리시의 시내버스 인종 분리 제도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공정한 분노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화를 낼 때 4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올바른 대상에게 화를 내는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의 원인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둘째로 올바른 시기인가를 따져야 한다. 불의를 당할 때 혹은 화가 날 때마다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장소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야 한다. 상대방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똑같이 대응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넷째는 올바른 목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다. 화를 내는 궁극적인 목적은 관계나 상황의 개선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올바르게 화를 내는 것은 화를 참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네.”   안세영 선수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는지 SNS를 통해 “많은 분을 놀라게 해 마음이 무겁다. 특히 힘든 노력 끝에 올림픽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가장 죄송하다. 축하와 영광을 누려야 할 순간들이 해일처럼 모든 것을 덮어 버리게 됐다”며 선수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안 선수가 분노를 표출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다만 금메달의 가치와 영광의 여운을 안고 귀국한 다음에 자리를 만들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해 전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여간에 안 선수의 분노가 한국의 배드민턴 환경 개선에 큰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올림픽도 끝났는데, 무덥고 긴 여름은 언제쯤 끝나려나?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변화 분노 안세영 선수 사회적 분노 신유빈 선수

2024-08-29

[문예 마당] 결혼식의 의미

  한국의 미를 표현하는 고사성어로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가 잘 알려져 있다.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다. 우리 문화유산을 관통하는 정신이다. 이 말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고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로  유명해졌다. 유 교수는 우리 문화유산을 설명할 때 자주 이 문구를 강조한다.   가장 인상적인 결혼식 주인공을 꼽으라면 아마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일 것이다. 그들의 결혼식은 많은 사람에게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1년 7월 29일, 영국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열린 ‘동화 같은 결혼식’,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전 세계에서 7억 5000만 명이 TV를 통해 지켜봤다. 영국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했고 영연방 국가들에서도 행사가 열렸다.     신랑 찰스 왕세자는 가슴에 영국 왕실 문장이 그려진 해군 정장을 입었다. 신부 다이애나비는 옅은 아이보리 색에 수천 개의 진주가 달려 있고, 7.6m 길이의 긴 트레인 드레스를 입어 화제가 됐다. 그들은 70년 된 왕실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입장했다. 다이애나비는 현대판 신데렐라가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 특별한 날을 보기 위해 6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고, 공식 초대 하객만 3500명이 넘었다. 그렇게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건만 불화로 15년 만에 이혼했다.   그 결혼식이 있을 무렵 한국에서도 나름 화려한 결혼식이 있었다. 친척 조카의 결혼식이었다. 조카는 당시 실세였던 장관의 아들과 결혼했다. 인물 좋고 가문 좋은 조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마담 뚜’라 불리는 중매쟁이가 나섰고 몇 번 만나지도 않고 결혼이 성사됐다. 이 서두름은 조카의 비극적 운명의 전조였다. 결혼식은 유명 호텔에서 열렸는데 축하 화환이 시내 큰길까지 늘어섰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조카는 남편과 함께 LA로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10여년 후 우리가 LA로 왔을 때 그 조카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조카는 갑자기 울면서 “아줌마, 내가 그 사람 버렸어”라고 했다. 아직 아이도 갖기 전이라고 했다. 너무나 착하고 순진한 조카가 남편을 버렸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기에 캐묻지 않았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남편의 의처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했다. 행복하게 잘살고 있겠지 생각했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     얼마 후 조카네 집을 방문했는데 주차장에서부터 2층까지 벽에 촘촘하게 그림이 붙어 있었다. 조카는 남편과 별거 후 두문불출하며 전공했던 회화만 그리며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동창회 골프클럽에 가입하는 등 사람들과 어울렸다. 한국문화원에서 민화 전시회도 했는데 유방암이 발견됐다. 조기 치료 덕에 완치 판정을 받았고, 5년이 지나 안심을 했다. 그런데 재발이 됐고 이번에는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형제들이 사는 한국으로 갔다 이듬해 세상을 뜨고 말았다. 혹시 결혼에 실패하고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암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안타까웠다.     최근 인도 최고 부자인 무케시 암바니의 막내아들 결혼식이 화제가 됐다.  암바니는 세계 9위이자 아시아 최고 부자이다. 지난 1월 약혼식을 시작으로 7개월에 걸쳐 행사가 진행되다 드디어 7월 12일 결혼식이 시작됐다. 사흘간 열리는 결혼식엔 세계 유명 인사들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등도 포함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인도 전통 의상을 입고 이들과 함께 했다. 결혼식 축하연에도 저스틴 비버 등 유명 연예인의 공연이 있었다.       암바니 가문은 하객들을 위해 전세기를 100대 이상 빌리는 등 결혼식 비용으로 6억 달러를 썼다고 한다. CNN에 따르면 뭄바이 지역 주민들은 암바니 가의 흥청망청 결혼식에 복잡한 심경을 나타냈다. 어떤 주민은 “본인 재산이지만 하는 짓이 정도를 벗어나 우스꽝스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가치 없게 쓰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들린다. 요란한 결혼식만큼이나 그들은 오래도록 행복할까?     세계적인 거부로 유명한 록펠러는 ‘나는 수천만 달러를 모았으나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포드 자동차를 창업한 헨리 포드도 ‘돈과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던 때였다’고 했다.     반면 그 결혼식에 참석했던 세계 3위 부자 저커버그는 소박한 결혼식으로 유명하다. 그는 2012년 집 뒤뜰에서 결혼식을 했다. 초대받은 하객 90여 명은 뒤뜰로 안내를 받고 나서야 결혼식임을 알았다고 한다. 본인이 디자인한 소박한 루비 반지를 신부 손가락에 끼워줬고, 인근 식당 음식을 주문해 피로연을 했다. 호화 결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인도식 초호화 결혼식이 저커버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궁금하다.   나의 결혼을 돌아봤다. 결혼식 무렵 무역회사를 하던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겼다. 남편도 부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됐다. 비가 오면 물이 발목까지 차는 이문동 버스 종점 인근에서 전세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맞벌이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 비슷한 시기 부모가 마련해 준 큰 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 친구가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그녀 앞에서 전혀 누추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몇 년 후에는 집을 장만했다. 남편도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그녀가 나를 부러워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사치할만한 형편이 되었지만 검소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젊은 시절부터 책상머리에 김천택의 시조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말라. 부디 긋지 말고 촌음을 아껴 쓰라.  가다가 중지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를 붙여놓고 교훈으로 삼았다. 또 ‘정직이 최고의 방책’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같은 말도 붙여 놓았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답사기' 강의를 들은 후로는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또 하나의 좌우명으로 마음 속에 담아두고 지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결혼식 의미 막내아들 결혼식 결혼식 주인공 친척 조카

2024-08-08

[문예 마당] 한국, 실버타운으로 떠나며…

  스물아홉에 캐나다에 이민 해 10년, 그 후 미국에서 40년, 오랜 북아메리카에서의 삶을 접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려 한다. 인생극 3막, 파이날 챕터를 고국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50년 살아온 터전을 옮기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2년 전 아내를 잃은 게 큰 몫을 차지했다. 아들 둘은 다 가정을 꾸렸고 막내딸도 혼인 날짜를 잡는 일만 남았다. 혼자 집에 덩그러니 남아 때때로 아내가 나타날 것 같은, 그래도 좋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고독이랄지 외로움을 실감하곤 했다. 처음엔 두렵고 낯설었지만 이것도 익숙해졌는지 나는 어느덧 홀로 있음을 즐기고 있었다. 우울할 필요도, 후회할 일도 없었다. 서자 막대기 휘둘러봐도 걸칠 게 없다. 오히려 일요일 법회에서 108대 참회문을 봉독할 때면 짜증이 났다. ‘지금껏 살면서 충분히 후회도 많이 했는데 뭘 또 108가지씩이나 참회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난해 가을 한국 방문 길에 강원도 동해시의 실버타운에서 일주일간 체험 숙박을 했다. 실버타운 5층 방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동쪽으로 난 넓은 창문으로 짙푸른 동해가 파노라마로 펼쳐졌고, 새소리를 들으며 숲속을 25분쯤 걸어 내려가면 망상 해수욕장 모래사장에 이른다. 풀러튼 캐슬우드 트레일에서처럼 매일 맨발로 젖은 모래를 밟으며 걸었다. 철석이는 파도 소리에 갈매기들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가끔 스치는 바닷바람은 지난 것들은 다 잊고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곳에 깨어 머무르라고 나를 흔들었다.     실버타운의 세 끼 식사는 매일 생일 잔칫상 같았다. 늘 색다른 반찬에 생선이나 고기 등 단백질이 많이 함유된 음식도 빠지지 않았다. 점심 후에는 운동실에서 운동하고 저녁엔 노래방에서 어울려 목청을 높였다. 약천온천수 목욕탕엔 사우나가 다섯 종류나 있었다. 평소 일광욕이나 사우나가 체온을 높여 땀으로 몸의 독소를 빼주고 엔도르핀이나 세레토닌, 도파민 같은 70여 가지의 좋은 호르몬은 많이 생성한다고 믿고 실행해온 터라 행운이다 싶었다. 과일이나 인삼을 햇빛에 말리거나 수증기에 찌면 당분이나 영양분의 수치가 높아지는 원리와 같다.     나는 이런 시설과 숲길, 바다 등의 환경이 맘에 들어 바로 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스키장이 가까이 있어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어 좋을 것 같았다. 또 속초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65번 동해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처럼 부산스럽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차만 있으면 설악산이나 오대산 월정사, 무릉계곡, 울릉도행 여객선이 있는 묵호항 등 청정지역을 쏘다닐 수 있을 것 아닌가?     서울이나 수원 등 복잡한 도심의 고급스러운 고층 타워의 실버타운은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풀러튼에서 LA에만 가도 번잡함이 싫었는데 노후생활에 대도시가 웬 말이냐는 느낌이 있어서였다. 사무실에 이듬해 12월쯤 들어오겠다며 대기자 명단에 올렸다. 집을 정리하고 미국을 떠나는 데에는 1년여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풀러튼으로 돌아와 집 안과 밖에 직접 페인트를 하고 욕조도 바꾸고 정원에는 꽃을 사다 심었다. 2월에 마음과 주변 정리가 끝나자 실버타운의 맛있었던 식사와 숲길, 바다의 파도 소리, 모래밭 맨발 걷기 등이 그리워졌고 예약한 12월까지 기다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나는 3월에 집을 내놓으며 실버타운에 전화했다. 집을 내놨는데 7월 초순이면 다 정리하고 갈 수 있으니 몇 달을 당겨달라고 했더니 보름 후에 준비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여기를 정리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살림살이를 정리해야 했는데 가구는 물론이고 책, 오디오 시스템, CD, LP 음반 등은 처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녀들과 주위에 나눠주고도 남은 것들은 2주에 걸쳐 거라지세일을 했다. 어디서 그렇게 물건들이 꾸역꾸역 나오는지, 치우면서도 계속 놀래야만 했다.     사진과 앨범, 비디오 영상 같은 마음속의 짐들도 오래전에 버리고 태워 없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난 과거가 없는 사람인 셈이다. 아들 둘과 딸, 8명의 손주도 벌써 내려놓았다. 평소 집착 없이 서로 독립적 삶을 살자고 실행해온 터라 자식이나 손주들이 눈에 밟혀서 전전긍긍하는 일 없이 자유스러웠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주말, 가족 15명이 모인 송별 파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은행에 집 판 돈이 들어있고 3남매 앞으로 리빙트러스트를 해놓았지만 아빠 빨리 죽기를 기도하지 마라, 나 그거 다 쓰고 죽을 거다.”     여기서 반 백 년을 살다 보니 이제 미국생활이 별 불편 없이 익숙해졌다. 이민 중반쯤엔 자리가 잡혀서 그랬는지 정치적 성향도 진보에서 보수로 바뀌었고, 영어는 손짓 발짓을 면하고 불편 없이 구사하게 되었다. 군대에서 군 생활 알만해지자 제대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지금 미국생활을 병장으로 만기제대하는 기분이다. 이민 올 때 낯선 땅, 서툰 영어, 다른 문화에 대한 불안과 기회의 나라라는 기대가 범벅이었던 때에 비하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는 역이민은 내게 달콤한 회귀의 설렘이 있다.     미국을 떠나는 지금 미련이나 후회도 없다. 오늘 아침에, 살던 집에 가 앞뒤 정원의 꽃과 과일나무에 물을 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이제 살던 집과 거리, 도시가 생각나기도 하겠지만 어쩌겠나 이제 그리워하지 말아야지, 지나간 꿈이었던 것을…. 김윤기 / 수필가문예 마당 실버타운 한국 소리 모래밭 숲길 바다 강원도 동해시

2024-08-01

[문예 마당] 멋모르고 살았다

나는 멋모르고 엄마가 되었다. 뒤돌아보면 아찔하다. 멋모르면서 살아온 것이 내 인생인 것 같다. 그래서, 새삼, 부끄럽기도 하고, 인생의 묘미함에 놀랍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다. 진심이다. 누구에게 미안하냐고 물어 온다면, 많은 해당 인물이 있다. 전능하신 분에게도 역시 그렇다. 그렇지만, 감사하다.     따져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그 자체가 뭣 모르고 생긴 일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이 내 의사를 묻지 않고 강제로 세상으로 데리고 나오셨으므로, 나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언니가 졸업한 중학교에 가라 해서 뭣 모르고 그리했다. 이어서 언니가 졸업한 대학, 같은 학과로 진학하라 하셨다. 그때에는 내가 좀 철이 들었기에 곰곰이 들여다보았더니, 내가 전공할 과목은 아니었다.     여자답고, 조신하고, 예쁘고, 숙녀라는 칭찬을 들으면서 컸던 언니는 그에 적합한 가정학을 전공했다. 가정경제, 음식의 역사와 개발, 한국 의복의 개조, 여성과 소아의 예절 같은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분야들이긴 했으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런 분야에 관심이 없었다. 말괄량이, ‘돌에 돌 치기’하듯 어른들에게 말대꾸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여대는 버릇없는 아이, 게다가 반짝이는 좋은 인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언니의 모교로 진학했지만,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되려는 사명감 같은 것은 없었다. 뭣 모르고 걷게 된 길이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저질렀다. 한 남자한테 반해서 그 남정네랑 함께하는 삶을 택하고 그의 마누라가 되었고 함께 한국을 떠나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우리는 용감했었던 것 같다. 이어서 뭣 모르고 아이들을 세상에 데리고 나왔다. 삶이 고달픈 것을 알기에, 미안하다.     그뿐이랴! 뭣 모르고 한국어진흥재단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또 뭣 모르고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까지 되었다.   내가 걸어 온 길은 잘 포장된 곧은 도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없이 걸었기에, 길이 안전한지, 주위가 멋있고 아름다운지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꼬불꼬불, 울퉁불퉁한 길도 많았을 터이다.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나고, 부주의로 벌에 쏘이기도 했을 터인데, 기억나지 않는다. 잊기로 작심을 했었던 것인가.   그러나 나는 감사한다. 뒤돌아보면 나는 디아스포라 한국계 미국인으로, 양쪽 문화와 역사 속에서 숨 쉬어 왔다. 엄청난 모험을 반세기 전에 시도한 탓이다. 몇몇 곳에 임시로 정착할 때마다, 주위에는 한국분들, 비한국계 친지들이 함께해 주었다. 지금도 지속하는 문화의 섞임이 허용된 풍성한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때부터 대다수 우리 조상들의 이주(移住)는 시작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일본, 미국, 멕시코, 유럽 등 곳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루었다. 어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든지 간에, 그분들은 반드시 두 가지 일을 했다. 그중 하나는 후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를 만든 것이다. 그 공동체 안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도우며 어려움을 어렵지 않게 해결하고, 문제가 될 법한 일들을 문제로 삼지 않고 과제로 삼고 살아왔다. 그들은 정답을 찾기보다 해답을 알았고, 그 해답을 현명하게 실행하며 살았을 것 같다.   비록 멋모르고 철없이 시작했던 새로운 길에서, 겸손을 배웠다. 환자들을 돌보면서 성실함을 익혔다. 그들이 어깨에 지고 걸어왔던 인생의 짐 보따리는 내 것과 다를 바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것들을 내려놓도록 도왔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국어진흥재단의 일 또한 나를 겸손하게 하였다. 선배들은 한국어진흥재단과 함께 그 특별하고 힘든 길을 쉼 없이 걸어왔다. 한글을 퍼트리고, 세계인들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물꼬를 트기도 했다. 우리 한국인들이 영어를 배웠던 것처럼, 세계인들도 한글을 배우는 것에 촉진제가 되었고, 그런 일에 헌신했다. 하고 나는 드디어 떠나온 모국의 ‘간접적 애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멋모르고 시작하고, 멋모르고 살아온 나에게는 서로 꼬면서 한 몸체를 만드는 한국인의 두 유전자 실마리가 존재한다. 나의 아이들도 멋모르고 살고 있을지 모른다.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꼬임을 잘 이루고 있는 유전자의 두 실마리가 그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류모니카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 한국분들 비한국계 우리 한국인들

2024-07-25

[문예 마당] 운동화 한 짝

  운동화를 한 켤레를 샀다. 무거운 발에서 벗어난 시원함일까, 자신의 직분을 다했다는 충만감일까,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이 참으로 홀가분해 보인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생각나는 신발 한 짝이 있다. 그 운동화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움과 원망의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가시네가 중학교를 졸업했으면 됐으니 공장에 가 돈을 벌든지 미용기술 같은 것을 배워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니 고등학교가 더욱 가고 싶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아 공짜로 학교에 다닌다는 말에 아버지도 더는 반대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한테 많은 빚을 진 기분이었다. 아버지한테 절대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던 내 결심과는 달리 학비를 뺀 책값 등등 모든 것이 아버지 몫이 되었다.                                                                   그래서 신고 다니는 내 운동화가 누렇게 색깔이 바래고 앞 두덩이 터져 발가락이 보여도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운동화는 뒤축이 떨어져 걸음을 걸을 때마다 뒤축이 찰딱거렸다. 아무리 발가락을 안으로 구부려 운동화를 눌러도 터진 두덩이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너덜대는 운동화도 아버지의 무시도 다 견딜 수 있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구겨지는 내 자존심을 삭일 길은 없었다.     그저 내게 만만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나는 징징거리며 어머니를 졸라댔다. 아버지 몰래 새 신을 산다는 것이 어두운 숲속에서 마라톤을 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 앞에서 무너지는 내 자존심을 생각하면….     시장에서 본 그 하얀 운동화, 그것은 정말 훔치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 울며 보채는 딸이 불쌍했던지 호랑이 시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새 운동화를 사주셨다. 그날 밤 나는 새 신을 가슴에 껴안고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했다.     다음날 여느 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하얀 운동화가 빳빳하게 세운 내 흰 교복 칼라와 맞물려 백조의 날개처럼 빛났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보란 듯이 허리를 쭉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도도하게 걸었다. 푹신한 쿠션에 둥둥 뜬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등굣길이 조금 더 멀었으면 싶었다. 신문지에 싸 온 헌 운동화는 뒤축을 구부려 실내화로 신었다. 차갑던 교실 바닥이 폭신폭신했다. 온종일 콧노래가 나왔다.     집에 오다 공원 벤치에 앉아 운동화를 가만히 만져보았다. 백합같이 보드라운 운동화가 흰 구름처럼 깨끗하고 사랑스럽다. 갈색 나뭇잎 하나가 팔랑 운동화 위로 떨어졌다. 나는 행여 빨간 물이 들까 봐 얼른 나뭇잎을 치우고 운동화를 탈탈 털었다. 집에 오자마자 먼지를 털어 마루 안쪽 구석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껴서 오래오래 신어야지. 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온 집안을 반짝거리게 했다. 그동안 낡은 운동화 때문에 찜찜하던 기분을 싹 털어낸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리라 생각하며 책을 펴들었다.     “저게 누구 신발이냐?” 외출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마루 위의 신발을 보고 노한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아차 했다. 운동화를 아버지 눈에 안 띄는 곳에 두었어야 하는 것을 너무 흥분해 깜빡했었다.     “제 신인데요”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헌 운동화는 어쩌고”     “학교에”   “이런 맹랑한 것 봤나. 당장 가서 가져와. 한참 더 신어야 하거늘.” 아버지가 곧 나를 후려칠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다 떨어진 그까짓 운동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밤중에 가져오라고 해요. 내일 학교 갈 때 가져오라고 합시다.” 어머니가 옆에서 한마디 하자 “저 여편네가 자식들을 저렇게 망친다니까. 당장 가져와.”   나는 부리나케 집을 뛰쳐나와 학교로 향했다. 구부러진 그믐달 아래 질척질척 걷는 내 발길이 교수대로 끌려가는 사형수 같았다. 컴컴한 골목에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벌벌 떨며 뒤를 돌아보면 내 그림자가 길게 멈춰 서곤 했다.     나는 엉엉 울면서 정신없이 뛰었다. 굳게 닫힌 교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나는 그 앞에 주저앉아버렸다. 꾸벅꾸벅 졸던 수위 아저씨가 눈을 비비며 교문을 열고 나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훌쩍대며 늘어놓는 내 얘기를 들은 수위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돌아 교실 문을 열어주었다.     “너희 아버지, 참 대단한 분이구나.” 다정히 등을 쓸어주는 수위 아저씨의 말에 나는 그만 또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왜 나를 그렇게 미워할까, 나는 아버지의 딸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또 내 머리를 휘저었다.                                         공원을 지나오다 다리 위에 앉았다. 푸르스름한 하천이 달빛을 받아 잔잔한 윤슬을 반짝이며 졸졸 흐르고 있었다. “이 운동화를 다시 신으라고,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가 못 버리게 한다면 내가 버릴 거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저 다리 밑으로 던져버릴 거야.” 나는 운동화 한 짝을 다리 밑으로 휙 던져버렸다. 또 다른 한 짝을 던지려는 순간 아버지의 불꽃같이 노한 얼굴이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안 돼! 나는 남은 한 짝을 가슴에 꽉 움켜쥐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지한테는 오다가 운동화 한 짝을 물에 빠뜨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버지는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 신을 신고 학교에 갔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래되었다. 나름대로 내게 절약하는 습관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 내가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는 이미 아셨을 것이다. 새 운동화를 살 때마다 하천에 던져버린 그 운동화 한 짝이 생각난다. 운동화도 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젠 미련 없이 버리자. 나는 새 신 옆의 헌 운동화들을 주섬주섬 플라스틱 봉지에 주워 담았다.   임지나 / 수필가문예 마당 운동화 수필 운동화 위로 운동화 때문 운동화 그것

2024-07-25

[문예 마당] 노인의 특권

  모처럼 한국을 방문해 친구들을 만나니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아프다 건강 타령이 주를 이룬다. 건강에 좋다는 음식이나 약 정보 교환도 활발하다.  그중에서도 공통으로 호소하는 것은 자꾸 깜빡깜빡하는데 혹시 치매가 아닌가 겁이 난다는 거다. 아무리 병은 자랑하라고 했다지만 오랜만에 모여서 아프다는 애기만 하다 헤어지면 기분이 씁쓸하다. 한때는 패기 만만하고 자기 영역에서 한몫하던 친구들이 어쩌다 이렇게 초라한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이건 친구들만의 처지가 아니고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얼마 전 분명히 무엇이 필요해서 시장에 갔는데 그 무엇이 생각나지 않아 다른 것만 사서 온 적이 있다. 집에 와서 잡채를 무치다가 그것이 참기름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이 먹으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한다. 아들은 나도 모르게 한 말을 또 하면 “엄마, 한 번만 더하면 100번째예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또 필요한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이 얘기 저 얘기가 꼬리를 문다.  그러면 아들은 “용건만 간단히!”라며 핀잔을 준다.  아들에게  “너도 늙어봐라” 응수하지만 나이 탓인지 서러운 생각이 든다.     미국의 어느 시인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라고 했다. 노인이어서 갑자기 그런 게 아니라 젊은 사람이 그대로 늙어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평생 젊은이로 살지 못하고 늙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젊은이들은 그들의 젊음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온종일 귓가를 맴돌았다. 노인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성경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나이 들면 외양은 망가져도 지혜와 판단력은 깊어진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전해진다.  노인은 지혜와 경험으로 젊은이를 인도해 주는 길잡이가 되고 그들을 받치는 기둥이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문제는 쇠약해지는 육체적 건강이다.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시들 듯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시간이 흐르면 쇠퇴하기 마련이다.     현실이 된 100세 시대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 봤다. 문득 오래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시청한 EBS 다큐프라임 ‘황혼의 반란’ 내용이 떠올랐다. 78~89세까지의 남녀 다섯 명이 한데 모여 30년 전과 같은 환경에서 7일 동안 생활하는 실험이었다.  ‘마음 챙김의 어머니’라 불리는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 엘렌 랭어가 했던 ‘시계 거꾸로 돌리기’와 같은 실험인데, 이들이 30년 전으로 돌아간 환경에서 생활할 때 심신의 건강 상태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간여행이었다.     참가자들은 잘 걷지 못하거나, 우울 증세가 있거나, 요리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실험 전과 후 면밀하게 건강 진단을 받았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들이 30년 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변화를 보였다. 또한 체중과 체지방이 줄고, 지팡이 없이 걸을 수 있었으며, 요리를 비롯해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났다. 불과 일주일 만에 일어난 긍정적 결과에 처음에 반신반의했던 참가자들도 놀라워했다. 그 실험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노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줬다.   생각 난 김에 그 실험을 나에게 적응해 봤다. 젊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몸의 자세나 걸음걸이에도 신경을 썼더니 “젊어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 있어요?” 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래 봤자 나이는 못 속이는지 요즘 몸의 여기저기가 탈이 나서 병원을 들락거린다.     어머님은 101세에 세상을 뜨셨다. 생전 한 번도 아프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원래 건강하셔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 집안일을 도와주시던 분을 통해 어머님이 편찮으셨다는 말을 들었다.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봐 당신 혼자 고통을 참으며 얘기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죽음을 앞두고도 그렇게 의연하셨다. 나도 어머님처럼 우아하게 늙고 싶다.     친구들 얘기의 끝마무리는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 세월 이기는 장사 없다’는 한탄이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모진 세월 긴장하며 살아왔는데 이젠 모든 것 풀어놓고 느슨하게 살고 싶단다. 그 힘든 과정을 되풀이 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는 것이다. “노년의 행복감이 청·장년 보다 높다”는 김형석 교수의 말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또 데카르트는 “궁핍하지 않고, 건강하고, 자식들이 효자면 인생에서 83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어느 책에 썼다.   교회에 가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 어떠니? 옷차림이 너무 야하지 않니?” 아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엄마 나이면 아무도 신경 안 써요, 거리에서 물구나무를 서도 아무도 안 쳐다봐요.” 그러면서 “그것이 노인의 특권이에요” 라고 말했다.     김이 샜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노인의 특권’이라는 아들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들은 노인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좀 주책을 떨어도 봐주고, 웬만한 흠은 눈감아준다. 다른 사람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으니 자유로워서 좋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궁금할 터이지만 나이 들어 좋은 점은 예상외로 많다. 우선 시간이 넉넉해 유유자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한가롭게 여행도 다니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나이 듦이 젊음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솔직히 말해 늙는 것이 뭐 그리 좋겠는가. 어찌했든 결국 나이는 먹고 마는 것, 내게 찾아온 노년의 나이를 힘껏 껴안아 주며 노인의 특권을 누리고 싶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 마당 노인 특권 친구들 얘기 건강 타령 건강 진단

2024-07-18

[문예 마당] 브루스 비치 파크의 역사

6월 달력의 19일은 '해방의 날(Juneteenth Day)'이라고 적혀 있다. 이날은 1865년 6월 19일, 연방군 소속의 장군 고든 그레인저(Gordon Granger)가 텍사스주 갤버스턴에서 '흑인들의 노예 해방 기념일'을 선포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준틴스 데이'는 텍사스에서 시작하여 여러 지역에서 오랫동안 기념되어 왔으며, 2021년 6월 17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면서 연방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이는 미국 역사와 문화에서 새로운 흐름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남가주 바닷가의 3개 도시(맨해튼비치, 허모사비치, 레돈도비치)를 중심으로 주말에 발간되는 '더 비치 리포터(The Beach Reporter)'라는 지역 신문은 지난 2007년 맨해튼비치시에 있는 '브루스비치(Bruce's Beach)’ 공원에 대한 특집 기사를 보도한 적이 있다. 이 공원은 태평양 바다를 따라 길게 뻗어 있는 하이랜드(Highland)길에 있으며, 지난 100여 년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은 마음속 고통과 슬픔이 담겨 있는 곳이다. 맨해튼비치는 부유한 도시로 주민의 90% 이상이 백인이다.     공원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윌라와 찰스 브루스(Willa and Charles Bruce)는 1912년  헨리 윌라드(Henry Willard)라는 인물에게서 이곳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는 땅과 주변 세 개 부지를 매입했다. 당시는 인종 차별로 인해 흑인이 해변 지역의 땅을 매입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윌라와 찰스는 매입한 부지에 공공 목욕탕과 식당을 만드는 등 해변 리조트를 만들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로스앤젤레스의 인구가 증가하고 부동산 가치가 치솟으면서 이 지역 백인과 흑인 사이에 인종적 긴장감이 높아졌다. 당시 맨해튼비치의 개발업자였던 조지 H. 펙(1856-1940)은 흑인들이 브루스 리조트에 방문하는 것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이 브루스 리조트 주위에 많은 것을 이용하여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땅에 ‘무단 침입 금지’라는 표지판을 세웠다. 이로 인해 브루스 리조트를 방문하려면 펙이 소유한 부동산 주변을 돌아 반 마일 이상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결국 1920년대에 브루스 리조트는 백인우월단체인 ‘쿠 클럭스 클랜 (KKK단)’의 공격을 받아 폐허가 됐다. 그러자 시 당국은 1924년 이곳에 공원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도메인(eminent domain) 절차에 따라 브루스 가문의 땅을 빼앗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그 땅에서 쫓겨났다.   브루스의 유족 중 한 사람은 “이곳은 우리 가족이 백인들로부터 심한 괴로움을 받던 곳”이라고 떠올리며 시 의회와 주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마침내 브루스 가족의 끈질긴 노력으로 거의 80년이 지난 2007년에 시 정부는 이 비극을 인정하고 공원의 이름을 ‘브루스비치’로 바꿨다.     2020년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국 소속 경관이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목을 눌러 숨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을 불러왔고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데모는 전국적으로 퍼졌다. 이 여파로 ‘브루스비치’에 관한 이야기도 인종 차별의 예로 다시 부각됐다. 맨해튼비치 시의회는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브루스비치 태스크포스’를 만들었다.   이어 2021년 4월 20일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 그리고 2021년 6월 2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상원이 해당 부동산을 브루스 가문의 후손들에게  반환하는 법안을 승인했고, 개빈 뉴섬 주지사는 그해 9월 30일 법안에 서명했다.     그 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회는 2022년 6월 28일 브루스가의 증손자인 마커스와 데릭이 법정 상속인임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토지를 반환했다.     이 공원 아래 바닷가 길인 더 스트랜드(The Strand)에는 ‘브루스비치의 역사(The History of Bruce’s Beach)'를 설명한 커다란 안내판이 있다. 이 안내판에는 맨해튼비치 시가 100여년 전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부터 토지를 탈취했다는 것과 브루스 가족이 겪은 부당함 등을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또 이런 역사를 알리고 커뮤니티 내에서 포용과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들도 있다.     그 후 브루스 가족은 2023년 1월 이 부지 (약 7000스퀘어피트)를 다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2000만 달러에 매각했다. 지금도 이 공원에는 표지판이 그대로 세워져 있다. 이명렬 / 작가문예 마당 브루스 비치 맨해튼비치 허모사비치 찰스 브루스 bruces beach

2024-07-11

[문예 마당]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아내와 함께했던 31년, 사랑하고 정다웠던 날들보다 아파했던 날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전 아내는 서둘러 갔다.   우리가 중매로 만났을 때, 그녀는 노처녀, 나는 아들이 둘이나 딸린 홀아비였다. 그녀는 LA 카운티병원의 면허 간호사였고, 나는 콜로라도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LA로 와 판촉물 광고회사를 막 시작한 영세업자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기운 운동장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나의 자존감이나 용맹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10여 년을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아온 홀아비와 장미꽃처럼 가시와 자존심이 세었던 노처녀의 결혼은 서로 간절했던 만큼 달콤했고 신혼은 아름다웠다.     내 사업은 기존 고객이 없기에 맨땅에 헤딩하기였다. 수입이 많은 아내가 마치 후원자처럼 버팀목이 되어 준 덕에 버텨나갔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자연스레 아내의 주도로 흘러갔다. 아내는 내게 필요한 옷이나 구두 등을 미리미리 사다 놓았다. 사이즈를 재거나 물어온 적도 없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쇼핑이나 집안 대소사에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왕자가 된 기분도 잠깐씩 들었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낯설기도 했다.     아내는 나를 양육하듯 보살피며 다스렸고 함께 상의해야 할 집안일도 혼자 결정했다. 하다못해 마루를 새로 깔고 지붕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하는 집수리 때도 내 의견은 무시되었다. 나는 매달 버는 돈에서 할당받은 액수를 내놓는 것도 벅찼지만, 아내의 수입이 정확히 얼마인지 집의 재정 상황은 어떤지 깜깜이였다. 그렇게 무시당할 때마다 왜 싸움을 안 했겠는가. 결혼에 또 실패해선 안 된다는 마치 하나님의 계명 같은 내 결심에 충실 하느라 설사 싸움이 벌어져도 일진일퇴의 부부싸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핀잔이었다. 나는 아내를 돌이킬 겸, 또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어 참회와 고마움의 마음을 담아 108배 절을 100일 동안 해보기도 했다.   아내는 아이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우리는 한인 여아를 입양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부터 10여 년 동안 피아노에 발레, 재즈 댄스, 바이올린, 첼로, 수학 학원, 테니스 교습, 수영 등 학원과 교습소를 순례하듯 다녔다. 아내는 늘 ‘애 ㅇㅇ학원에 등록했으니 몇 시에 데려가고 몇 시에 데려오라’는 통보만 하는 식이었다.   아마 결혼생활 10년 차쯤부터였을까.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나는 삶도 사업에도 재미를 느끼거나 동기부여 없이 우울의 못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주치의가 처방해준 약은 오히려 극단적인 생각마저 하게 했다. 의사는 세 번이나 다른 약을 처방했지만 약만으로는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 발로 정신과 병원을 찾았다. 상담을 통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괴로움도 유발된다는 사실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정한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사의 권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변호사를 찾았다. 그러나 아내의 사과와 8가지 약속을 받고 이혼소송을 취하했지만 그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아내는 한 가지도 바뀌는 게 없었다. 그렇게 소송과 취하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짐에 가서 라켓볼을 치거나 근육운동을 하고 사우나로 마무리하면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명상에 심취했고, 명상과 트래킹을 위해 한국은 물론 미얀마나 네팔 등을 찾기도 했다. 그런 여행을 다녀오면 더 고요하고 안정감을 느꼈다.     아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고하고 완벽주의적인 삶의 태도 때문이었는지 두 번의 암 수술 등으로 고생하다 70세도 못 넘기고 먼저 갔다. 장례식 후 화장을 해 유골은 뒤뜰 비탈진 정원에 뿌렸다. 그리고 정원에 아내 이름을 따 ‘Kyung’s Garden'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겠지만, 삶의 짐을 다 내려놓고 떠났다면 미움도 용서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종종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내 생각이 나면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정원 푯말을 보곤 했다. “여보 왜 그랬어? …미안해. …고마워.’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내가 가장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묻곤 했다. 왜 그랬느냐고. 그러면서도 아내에게 잘 해주질 못해 미안했다. 아내가 남긴 연금 등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도 놀랐다.     지난해 한국에 갔다 고향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길을 걷다 ‘사주 궁합’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 늘그막에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두 사람 걸 다 봐야 하니까 4만 원요." 숨진 아내의 생년월일과 내 것을 주었다.     "이 여자분은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는데 남자였으면 좋았을 만큼 대장감 사주예요. 이분 사업하시나요? 사람들을 거느리는…."   나는 밖으로 뛰쳐나와 호텔로 향하다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미스리가 이렇게 싱겁게 풀리다니…, 진작 알았더라면 접어주고 살지 않았을까? 나는 ‘여보, 왜 그랬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  김윤기 / 수필가문예 마당 미안 수필 아내 생각 아내 이름 정원 푯말

2024-07-11

[문예 마당] 뜬구름 잡기

얼마 전 운전을 하다 한 편의점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사람들을 봤다. 1등 당첨금이 10억 달러가 넘는 복권을 사려는 사람들이었다. 당첨만 된다면 대대손손 부자로 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미국 전역이 복권 관련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때다. 당시 그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벼락을 두 번 맞는 것보다도 낮다고 했다. 그만큼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록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발표 전까지는 억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즐겁다고 한다.   지금까지 복권을 산 적이 두 번 있었다. 공교롭게도 두 번 모두 직장을 다닐 때였다. 회사 동료들과 단체로 복권을 샀는데 그때도 1등 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때 복권 구매에 참여한 것은 일확천금의 불로소득을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료들에게 따돌림당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뜬구름 잡는데 참여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는 성직자 한 분은 “복권을 사는 것은 노숙자 돈을 갈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까지 한다. 매달 주 정부나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복지 지원금을 복권 구매에 탕진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란다.   복권과 관련해 25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음식점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 3명이 일을 끝마치고 공동으로 즉석 복권을 사기로 했다. 당첨되면 3명이 똑같이 당첨금을 분배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여러 장의 복권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한 장이 5000만원에 당첨됐다. 당시 그 액수를 3등분 하더라도 이들이 20년 동안 저축을 해야 만질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은행이 문을 열면 당청금을 찾기로 하고 그 복권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혼자 챙기려는 욕심이 생겨 동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해 그 복권을 갖고 줄행랑쳤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나머지 두 명은 즉시 은행에 지급 정지를 요청했고, 복권을 들고 도주했던 욕심쟁이는 결국 절도죄로 체포가 됐다. 욕심은 정신적인 것에 두어야지 물질적인 것에 두면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다.   다양한 종류의 복권이 있는 미국에도 복권 당첨자 관련 이야기가 많다. 그중 하나가 복권 당첨으로 인생 역전을 이뤘다가 끝내는 노숙자로 전락한 남자 이야기다. 그는 복권 당첨 후 자가용 비행기까지 몰고 다니며 돈을 물 쓰듯 낭비하고 허세를 부리며 다녔다. 그 결과 당첨금을 3년 만에 모두 날려 버리고 노숙자가 됐다는 것이다.     한 조사 기관에서 거액의 복권 당첨자들을 추적 조사했더니 그중 99%가 거액이 생긴 후 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다며 복권 구매가 후회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씁쓸해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복권 1등에 당첨되면 그 돈의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겠다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일확천금이 일단 수중에 들어오면 마음이 변한다고 한다. 나 또한 불로소득에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며 교만과 허세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장담 할 수 있는가.   내가 근무하는 양로 보건 센터에 한국에서 온 대학 졸업반 학생이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 학생과 점심시간에 식사하며 우연히 복권 이야기를 나눴다. 그 학생은 자신은 복권을 한 번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일시에 일확천금이 생긴다면 자신의 꿈과 도전은 사라지고 안일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인생에 파멸이 올 것이라고 했다. 땀 흘려 일한 만큼, 수고한 만큼 결실을 얻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니냐고 나에게 반문하였다. 순간, 그 학생한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청년의 사고방식이 너무 듬직해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았다. 그 학생처럼 삶의 철학이 건전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 조국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이제는 나도 어떤 것이든 ‘뜬구름 잡기’는 여기서 멈춰야 겠다. 이진용 / 수필가문예 마당 뜬구름 수필 복권 당첨자들 복권 이야기 복권 구매

2024-07-04

[문예 마당] 내가 보이면 세상도 보인다

당나귀와 같은 근성에 휘두르는 회초리가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 입성 때 탔던 당나귀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의미가 있는 교훈이다. 당나귀 가는 길에 몸에 두른 옷을 벗어 깔아 놓고 빨마 가지(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당나귀는 착각 현상에 빠져 붕 뜰만도 하지 않았겠는지?   칭찬과 자화자찬을 조심하라는 뜻에서 옛 성인들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 것이 당나귀 회초리다. 일반적인 의미의 회초리가 아니고 나처럼 나르시시즘이 다분한 사람에게 필요한 약이다. 세속적 도발성과 충동을 제어하는 것에 약하다 보면 자신의 본질을 놓아버리게 된다. 눈길을 따라 들락날락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휩쓸리는 짓거리가 보이면 즉시 두문불출로 대응한다.   내면으로 숨어드는 내공의 연습도 필요하다. 깊이 가라앉는 마음의 바닥이 보일쯤이면 어느새 1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명상 중에 흘러갔던 것들을 기록한다. 때로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우성, 오래전에 있었을 법한 무의식에서 걸어 나오는 어린아이라고 해야 할지? 본적도 느낌도 없는 관계지만 마음의 언저리에서 서성인다. 때로는 시공을 넘어와 포개 앉은 다리에 무릎을 부치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으로 쳐내 버린다.   삶과 피안의 세계 경계를 확실히 해두고 싶은 손짓이었는데 마음은 무거워진다. 튀어나온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왜 아우성처럼 느꼈는지? 곱씹으려 해도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는 어린 시절 나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까불고 팔랑거리다 못해 촐싹거리는 어린아이가 나의 자화상이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누군가가 규정지어 주는 것이 싫다. 그대로 붙들려 그것처럼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이다.   별스러운 자화상 없이도 과거에 붙들림 없이 잘 지내왔다. 사람은 믿고 의지할 존재라기보다는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이 회복의 길임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 눈이 예쁘네, 어디서 했수?” “아, 내 눈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탐색의 코드부터 엇갈리기 시작하면 차라리 용모 지상주의 선전포고를 인정하여 맞장구를 치는 재미도 있다. 숨어있던 자화상이 기어 나와 나 역시 침을 튀길 기회다.     젊은 날의 초상까지 보여 주면 대화는 지속한다. “리모델링한 거 아니지?” “나, 40대에도 교인 할머니가 자기 아들 중매 서겠다고 찍힌 거 알아?” “알지, 저이가 누구누구 차 타고 교회에 왔다가 그이 누이한테 딱 걸려서 노총각 혼삿길 막을 셈이냐고, 그때 그런 일이 있었거든” “남편의 부탁으로 타고 온 것이 그렇게 된 거지 뭐….”   나의 인정하기 싫었던 자화상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포장으로 부풀리는 거짓 자아다. 이 때문에 당나귀 회초리는 모욕을 가하는 무기가 되어 준다. “헤이, 주책없는 당나귀야, 주인공은 네가 아니야. 히힝거리지 말아라.” 때로는 “이 늙어빠진 당나귀야 나대지 말고 잠잠해라” 하면 신기하게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다소곳해진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독이 오른 뱀처럼 눈에 불을 켰을 것이다. 그러나 갚으려고 기회를 노릴 것도 괜한 감정 낭비로 밤잠을 설칠 필요도 없게 된다   마음과 의지만으로 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아는 길들여야 한다. 길들이지 않는 자아는 분노에 휘말릴 확률이 높아진다. 자아는 상처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고 방어기제에는 능하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조용한 시간에 촛불을 마주하고 내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자아를 길들인 사람은 앉아 있는 한 시간이 무척 평화롭고 빠르다. 그러나 초보자는 단 십 분도 견디기 힘들 것이겠지만 분노 오해 등 부정적 속성인 자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감내해야 한다.   무조건 앉아야 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렵다. 몸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분심 잡념의 방해도 심하다. 자아를 길들이는 일이 수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의 통제를 받는 자아는 충고와 모욕에 순응하며 주인을 알아본다. 최경애 / 수필가문예 마당 수필 당나귀 회초리 아우성 오래전 부정적 속성인

2024-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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